역사에는 그 이름만으로도 가슴을 서늘하게 만드는 장소들이 있습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부산 형제복지원'은 바로 그런 이름일 것입니다. 

'복지원(福祉院)'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하고 긍정적인 이미지와는 정반대로, 이곳은 국가의 묵인 아래 자행된 우리 역사상 가장 참혹한 인권유린의 현장이었습니다. 

수많은 언론 보도와 생존자들의 증언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의 전모와 그 비극의 깊이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여전히 많지 않습니다.

이 글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나열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왜 평범한 시민들이 하루아침에 지옥으로 끌려가야 했는지, 어떻게 한 개인의 탐욕이 국가 권력과 결탁하여 수천 명의 삶을 파괴할 수 있었는지, 그리고 30년이 훌쩍 넘은 지금까지도 왜 이 비극이 끝나지 않았는지를 심층적으로 추적하고자 합니다. 

이는 잊혀 가는 역사를 바로 보고, 희생자들의 고통을 기억하며, 우리 사회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모두의 책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시대적 배경: 화려한 올림픽, 그 이면의 어두운 그림자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당시 대한민국은 군사 독재 정권 아래, 경제 성장을 최우선 과제로 삼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과 1988년 서울 올림픽 유치는 국가적 위상을 전 세계에 과시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정부는 성공적인 국제 행사 개최를 위해 '깨끗하고 질서 있는 선진국'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데 총력을 기울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도시 환경 정화'라는 명목으로 대대적인 사회 정화 캠페인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캠페인의 주요 표적은 '부랑인'이었습니다. 

정부는 도시의 미관을 해친다는 이유로 거리의 노숙인, 걸인, 장애인 등을 사회로부터 격리하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국가적 방침은 한 개인에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여주고, 끔찍한 비극의 문을 여는 결정적인 배경이 되었습니다.

무법의 근거: 내무부 훈령 제410호와 무차별 납치

1975년, 내무부(현 행정안전부)는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지침'이라는 훈령을 제정합니다. 

바로 '내무부 훈령 제410호'입니다. 이 훈령은 경찰과 공무원에게 신원이 불분명하거나 일정한 주거가 없는 사람을 영장 없이 강제로 시설에 수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습니다.

문제는 '부랑인'에 대한 기준이 전혀 없었다는 점입니다. 경찰은 실적을 올리기 위해 길을 가는 행인을 무작위로 붙잡았습니다. 

버스를 기다리던 평범한 직장인, 술에 취해 잠시 길에 앉아 있던 사람,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이, 심지어는 경찰서에 민원을 넣으러 온 시민까지 '부랑인'으로 낙인찍혀 형제복지원으로 끌려갔습니다.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는 공권력에 의해 무참히 짓밟혔고, 한번 잡혀 들어가면 그 누구도 자신의 무고함을 증명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습니다. 이는 사실상 국가가 허가한 대규모의 '인간사냥'이었습니다.

인간 존엄성의 말살: 강제노역, 폭력, 그리고 죽음의 공장

부산 북구 주례동에 위치했던 형제복지원은 국가로부터 매년 수십억 원의 보조금을 받는 전국 최대 규모의 부랑인 수용시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내부는 '복지'라는 이름으로 위장된 거대한 강제수용소이자 노예 공장이었습니다.

수용자들은 입소와 동시에 이름 대신 번호를 부여받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권리를 박탈당했습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의류, 신발, 어망 등을 만드는 강제 노역에 시달렸으며, 생산 할당량을 채우지 못하면 무자비한 구타와 고문이 뒤따랐습니다. 

식사는 굶주림을 겨우 면할 정도의 부실한 배식이었고, 비위생적인 환경으로 인해 전염병이 창궐했습니다.

더욱 끔찍한 것은 일상적으로 벌어진 폭력이었습니다. 원장 박인근과 그를 따르는 소대장들의 지시에 불응하거나 반항하는 기미만 보여도 '죽음의 방'이라 불리는 곳으로 끌려가 각목과 쇠파이프로 집단 폭행을 당했습니다. 

여성과 아동에 대한 성폭행도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망자만 513명에 달하며,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수의 희생자가 암매장되거나 시신이 의과대학 해부용으로 팔려나갔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곳은 인간 존엄성이 완벽하게 말살된, 이 땅의 아우슈비츠였습니다.

좌절된 정의: 솜방망이 처벌과 기나긴 침묵

이 끔찍한 범죄는 1987년, 당시 울산지검 소속이었던 김용원 검사의 끈질긴 수사로 세상에 알려지게 됩니다. 

그러나 외압으로 인해 수사는 조기에 종결되었고, 사건의 주범인 원장 박인근은 수천 명을 불법 감금하고 폭행, 살해한 혐의가 아닌, 정부 보조금 횡령과 같은 지극히 가벼운 혐의로만 기소되었습니다. 

대법원은 그에게 고작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했습니다.

이후 형제복지원 사건은 오랫동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국가는 책임을 회피했고, 사회는 생존자들의 고통에 귀를 닫았습니다. 

하지만 진실을 밝히려는 생존자들의 처절한 투쟁은 결코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피 맺힌 증언과 노력 끝에, 2022년 8월, 제2기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는 마침내 형제복지원 사건이 "공권력에 의한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임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국가의 사과와 피해 회복을 권고했습니다. 

30여 년 만에 내려진, 너무나도 늦은 진실 규명이었습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 되풀이되지 않을 역사를 위하여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 악마적인 개인의 범죄가 아니라, 국가 발전이라는 명분 아래 개인의 인권을 얼마나 쉽게 짓밟을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 자화상입니다. 

국가가 국민을 보호하지 않고 오히려 폭력의 주체가 되거나 방조할 때, 어떤 비극이 벌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합니다. 이 사건의 진실을 제대로 알리고,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며, 생존자들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한 실질적인 노력을 함께해야 합니다. 

국가의 공식적인 사과와 정당한 배상은 물론, 이 비극이 역사 교과서에 정확히 기록되어 다음 세대가 배울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만이 제2, 제3의 형제복지원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자주 묻는 질문 (FAQ)

Q1: 부산 형제복지원을 운영한 공식적인 명분은 무엇이었나요?

A1: 공식적인 명분은 '부랑인 선도 및 자활 지원'이었습니다. 정부는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도시 미관을 해치는 부랑인을 보호하고 계도한다는 명분 아래, 형제복지원과 같은 시설 운영을 지원하고 부랑인 단속을 장려했습니다.

Q2: 형제복지원에는 정말로 노숙인이나 걸인만 수용되었나요?

A2: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가장 큰 비극 중 하나는 경찰의 무분별한 실적 위주 단속으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시민들이 끌려갔다는 점입니다. 길을 잃은 어린이, 학생, 평범한 직장인 등 단지 주거가 불분명해 보이거나 신분증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강제 수용된 피해자가 대다수였습니다.

Q3: 진실이 밝혀지기까지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나요?

A3: 1987년 검찰 수사 당시에도 외압으로 인해 수사가 축소되었고, 사건의 본질인 인권유린과 불법감금이 아닌 횡령 등 가벼운 혐의로만 기소되었습니다. 이후 역대 정부는 국가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으며, 생존자들의 수십 년에 걸친 끈질긴 투쟁 끝에 2022년에야 비로소 국가 차원의 진실 규명이 이루어졌습니다.

Q4: 현재 형제복지원 피해자들을 위한 구제 절차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나요? (2025년 기준)

A4: 2022년 진실화해위원회의 진실규명 결정 이후, 정부와 국회는 특별법 제정을 통해 피해자들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 배상 및 트라우마 치유 지원 등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배상 규모와 방식을 둘러싼 이견으로 법안 처리가 지연되고 있어, 피해자들의 실질적인 명예 회복까지는 아직 갈 길이 먼 상황입니다.